연필

부암동을 거닐다가 초입의 빙수 가게에 들어갔다. 빙수가게라기보다는 동네 사람들이 서로 수다를 나누는 공간으로 보였고, 소품도 파는 오래된 분위기의 가게였다.


주문한 빙수를 기다리는 동안, 가게안을 이리저리 구경했다.
다양한 핸드메이드 제품들이 있었고, 제품 하나하나마다 주인장이 연필로 적은 메모가 있었다.



“오? 글씨 이쁘다. 그리고 연필이네?“

난, 연필을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우리는 현재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유튜브, 틱톡, 인스타 내의 쇼츠가 유행이고, 스마트폰에 알람이 울리면 빨리 보거나 답장을 보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는 정신없이 빠른 시대에 살고 있다.

연필을 쥐면, 다르다. 하나하나 천천히 적어야 한다. 키보드처럼 빠르게 입력할 수 없고, copy & past도 어렵다. 그리고 뭉뚝해지면 깎아야 한다. 정신없이 빠른 시대에 느린 흐름을 선사한다.

연필을 깎을 때에는 매우 평온하다. 연필을 손에 쥐고 깎으면 “사각사각” 소리가 귀를 감싼다. 부드러운 소리와 향이 하루를 마감하는 이 시간에 마음도 정리되어 간다.

이런 단순한 행위는 많은 가르침을 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조금씩 다듬어 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조급하게 생각하면 부러지고, 지나치면 뾰족해진다. 적당하게 깎아야 흡족한 결과물을 얻게 된다. 이것이 연필을 깎는 행위에서 배운 경험이다.

연남동에는 “흑심”이라는 연필 가게가 있다. 요즘 누가 연필을 쓴다고, 이런 가게를 오픈했는지 모르겠다.
가끔 방문하면서 무언가를 사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필기구로 가득한 문구점이라는 공간은 연필이 품고 있는 “흑심”을 나에게 전파해 주는 역할을 한다.

연필은 “흑심”을 품고 있다.
흑심은 사전적 의미로는 부정적이다. “음흉하고, 부정한 마음“ 이란 뜻이다. 어째서 이런 의미의 단어가 생겼을까? 나 어른들 탓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롤렉스와 몽블랑을 산다고 한다. 나도 몽블랑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파버카스텔의 퍼펙트 펜슬도 가지고 있다. 난 성공한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소유 이유는 단순하다. 장인들이 만든 연필과 만년필의 사각 거림이 좋아서다.



내가 몽블랑을 쓸 때면, 사람들은 구경 좀 하자고 한다. 반면 퍼펙트 펜슬이 아닌 일반 연필 “블랙윙”을 사용하면 큰 관심이 없다. 블랙윙이야 말로, 많은 작가들의 손을 거친 제품인데도 말이다. 모든 가치가 “가격”에 책정된 시대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누군가가 가끔 묻는다.

“연필을 왜 쓰는 거예요?”

“바디가 아름다워요. 칼로 깎았을 때와 연필깎이로 깎았을 때가 달라요. 그리고 연필을 깎는 행위가 좋아요. 도 닦는 기분이에요. 필기감이 독보적이에요. 지금 시대에도 이런 녀석이 없어요. “

물어본 분들이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라는 말이 있다.
펜은 틀릴까 봐 긴장되지만, 연필은 언제든 지울 수 있다는 것에 비유된 말일 거다. 혹시 잘못되었을 경우, 지우개로 박박 지우라고 연필로 쓰라고 한 걸까?

하지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연필로 쓰면 언제든 지울 수 있다는 가벼운 느낌이기에 “미완성”의 기분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지우개로 지운다고 그것이 영원히 사라질까? 반대로 지우지만 않는다면 가장 오래가는 재료가 “흑연”이다.

오늘도 난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연필을 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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